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언제
3/29/2020, 12:14: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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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디서
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1.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져도 나는 그의 삶의 5분의 3을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도 결국은 그저 내 방을 잠시 지나쳐가는 손님일 뿐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낯선 길에서 비를 맞아야 했던 노인,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실패자 중의 실패자로 기억될 그 낯선 노인이 내 눈앞에 앉아서 딴청을 피웠다. 직장에 나간 엄마 대신 나를 업어 키운 그였다. 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효도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었다.
2.
그 예순다섯 날들만큼 하루하루를 깨어 살아본 적은 없다. 우리 셋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방에서 함께 잤다. 할아버지가 장롱 쪽에서, 엄마가 문가에서, 내가 그 가운데에서 잤다. 불을 끄고 천장을 보면서 하던 이야기들. 그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말들도 용기를 내서 주고받았다. 마치 처음 사귀는 사람들처럼.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사람들처럼.
3.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